당신의 쇼핑 카트는 왜 늘 채워져 있고, 최신 스마트폰을 손에 넣어도 왜 금세 새로운 것을 갈망할까요? 스피노자, 라캉, 들뢰즈 등 위대한 철학자들의 눈을 통해, 우리를 지배하는 '욕망'의 본질을 파헤칩니다. 허황된 갈망에서 벗어나 진정한 만족을 찾는 철학적 지혜를 얻어 가세요.
우리는 왜 만족을 모르는 괴물이 되었을까?
우리의 욕망은 단순히 무언가를 채우려는 공허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타인의 욕망을 끊임없이 모방하도록 설계된 결과물에 가깝습니다.
한번 솔직해져 볼까요?
SNS를 열면 온통 타인의 행복과 소유물로 가득합니다. 친구가 새로 산 가방, 동료가 다녀온 해외 휴양지, 인플루언서가 추천하는 레스토랑. 그것들을 보기 전까지 나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보는 순간,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죠. '나도 갖고 싶다', '나도 저기 가고 싶다'는 갈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의 본질 아닐까요? 우리는 어쩌면 타인의 욕망을 전시하는 거대한 쇼윈도 속에서, 진짜 내 것이 아닌 욕망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욕망은 살아있다는 증거
철학자 스피노자에 따르면, 욕망은 생명체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힘을 확장하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성, 즉 '코나투스(Conatus)'입니다. 이는 결코 부정하거나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욕망을 자동차의 '엔진'에 비유해볼 수 있습니다. 엔진이 꺼진 자동차는 움직일 수 없듯, 욕망이 없는 인간은 살아갈 동력을 잃어버립니다. 무언가를 성취하고, 배우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의지 모두가 이 코나투스에서 비롯됩니다.
문제는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강력한 엔진의 '운전 방향'을 어디로 설정하느냐에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욕망 자체를 죄악시하며 억누르려 하지만, 스피노자는 오히려 그 힘을 긍정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때 진정한 기쁨(Laetitia)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욕망은 끄거나 없애야 할 불이 아니라,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에너지원인 셈입니다.
라캉의 경고: "당신의 욕망은 진짜 당신의 것인가?"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우리에게 매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욕망은 사실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왜 특정 브랜드의 옷, 특정 지역의 아파트가 갑자기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일까요? 그 대상 자체가 지닌 고유한 가치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회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은 가치 있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말하기 때문일까요?
라캉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는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합니다. 사회가 선망하는 대상을 나도 선망함으로써, 그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인 갈망이 그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인싸'가 되고 싶고, '트렌드'에 뒤처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바로 그것이죠. 지금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그것, 정말 당신이 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타인의 욕망을 당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들뢰즈의 '욕망 기계': 소비 사회는 어떻게 당신의 갈증을 만들어내는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의 욕망, 즉 '욕망 기계'를 특정 상품 소비로 연결시켜 끊임없이 새로운 갈증을 느끼도록 만드는 거대한 시스템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결핍'이 아니라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연결하려는 '흐름'으로 보았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본래 정해진 대상 없이 흐르는 에너지와 같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 흐름에 '스마트폰 신제품', '한정판 운동화', '시즌 음료' 같은 댐을 설치합니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신제품을 사면), 시스템은 곧바로 다음 버전의 새로운 댐(더 좋은 신제품)을 제시하며 우리의 욕망이 다른 곳으로 흐르지 못하게 막고 다시 소비로 연결시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소비하는 주체'로 살아가게 됩니다. 공허함은 소비의 결과가 아니라, 이 시스템의 작동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인 셈입니다.
현명하게 욕망하기: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3가지 철학적 태도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거대한 욕망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철학은 욕망을 없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욕망의 주인이 되라고 조언합니다. 그 지혜를 3가지 태도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 "욕심이 많아 문제예요"라고 자책하는 당신에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마도 스스로를 '욕심쟁이'라 여기며 괴로워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압니다. 당신의 욕망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것은 살아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더 나은 삶을 향한 엔진입니다. 문제는 엔진 자체가 아니라, 네비게이션 없이 남들이 가는 길만 따라가는 운전 방식에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손으로 직접 운전대를 잡을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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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찰하기 (거리두기): 내 안에서 '갖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솟아오를 때, 즉시 행동으로 옮기지 마세요. 마치 강 건너 불 구경하듯, 그 감정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세요. '아, 지금 내가 무언가를 욕망하고 있구나. 이 욕망은 어디서 왔을까?' 이 질문만으로도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첫걸음을 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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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별하기 (진짜와 가짜 구분하기): 그 욕망이 '타자의 욕망'인지, 나의 '코나투스'에서 비롯된 것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진정으로 성장시키고 기쁘게 하는가? 아니면 단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인가? 이 선별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불필요한 갈망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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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재정의하기 (나만의 기준 세우기):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과 행복의 기준을 무작정 따르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당신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요? 당신을 진정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소유가 아닌 경험, 과시가 아닌 성찰, 경쟁이 아닌 연대에서 기쁨을 찾는 등, 나만의 욕망의 방향을 새롭게 정의하고 그 길을 따라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만족에 이를 수 있습니다.
결국 욕망의 철학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말해줍니다.
당신의 욕망은 당신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을 통해 진정한 당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림자에 이끌리지 않는 삶의 주인이 되십시오.
자주 묻는 질문 (Q&A)
네, 철학적으로 볼 때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스피노자가 말했듯 욕망(코나투스)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삶의 원동력입니다. 욕망을 없애려는 시도는 삶의 에너지를 끄는 것과 같습니다. 목표는 '제거'가 아니라, 욕망의 본질을 이해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관리'하고 '조율'하는 것입니다.
매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은 '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선별하는' 훌륭한 훈련입니다. 명상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판단 없이 '관찰하는' 연습을 통해 충동적인 행동을 막고 마음의 공간을 넓혀줍니다. 이들은 욕망을 억압하는 기술이 아니라, 현명하게 다스리는 철학적 태도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입니다.